수인 딜레마의 문제
인간사회가 수인의 딜레마를 성공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가의 문제는 인류의 생존이 담보되어 있는 절체절명의 문제이다.
수인의 딜레마의 해결책은 합리적 행위자로 하여금 파레토 최적성(Pareto optimality)을 성취하도록 만드는 방식에 관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도덕적 해결책, 혹은 내적 제재와 정치적 해결책, 혹은 외적 제재의 두 가지 방식으로 나눈다.
도덕적 해결책은 행위자의 합리성 자체에 대한 변화를 가함으로써 외부적 물리력에 의존하지 않고 해결하는 방식이다. 맥레넨은 일방이 타방에게 비협조적 선택을 할 의사가 전혀 없음을 명백하고 확고하게 보여줄 때, 타방도 그에 호응하는 방식으로 상호협력을 성취하는 것이다.
얼핏 문제의 핵심을 회피하는 듯한 해결 방식이지만, 반복되는 수인의 딜레마 상황에서 변증법적 사고 과정을 거쳐서 학습할 수 있는 방도라고 할 수도 있다.
즉 비협조적 행위의 선택이 개인적으로 전혀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가 온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고, 자신의 협동 의사를 명백하게 표명함으로써, 상대방의 신뢰를 회복할 수도 있을 것이다.
롤즈의 원초적 입장에서의 사회계약도 도덕적 해결책의 한 예이다. 자신의 특수한 상황에 대한 인식을 할 수 없고, 일반적 지식만을 가진 합리적 개인들은 최악의 상황에 대한 최대한의 배려, 최소 극대화 (maximin) 전략을 채택함으로써 수인의 딜레마 상황으로부터 탈출하는 것이다.
핵사고에 대한 국제적 대책도 핵 안전사고로 인하여 누가 피해자가 되고, 누가 가해자가 되는지를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에서의 의사 결정 과정은 롤즈의 원초적 입장과 유사하다는 제안은 설득력이 있다.
정치적 해결책은 외적 물리력에 의존해서 개인의 합리성의 추구가 가져오는 바람직하지 못한 상황을 극복하는 방법이다. 자유 경쟁 시장에서의 교환조차도 계약이행을 강제집행하는 정부기관을 전제로 한다.
가장 극단적인 해결책으로 홉스의 절대 국가론을 들 수가 있다. 홉스의 자연 상태는 도덕과 법이 부재하는 상태이고, 그것은 다음의 네 가지 가정에 기초한다.
첫째, 인간의 기본적 욕구는 상호 유사하다.
둘째, 인간의 능력은 상호 유사하다.
셋째, 자원은 희소하다.
넷째, 인간은 제한적 이타주의, 또는 심리적 이기주의를 지향한다.
이 네 가지 가정이 충족되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연 상태를 자발적으로 극복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절대적 군주에게 신민들이 자연 상태에서 가지고 있던 모든 권리를 양도하고 생명의 보호를 대가로 보장받는 사회계약을 체결한다는 것이다.
법의 확립과 권세와 술수의 행사가 국가의 질서를 위하여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법가의 사상도 정치적 해결책이다. 일단 제정된 법은 독자성을 가지는 것이어서 왕도 그 앞에서는 복종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인간의 자율적 도덕 능력에 대한 회의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묵가의 겸애사상도 보편적 사랑을 위반하는 사람에게는 종교적 제재와 정치적 제재를 통하여 복속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절대 주권자가 존재하지 않는 현재의 국제사회에서 만족할 만한 정치적 해결책은 있을 수 없다.
결국 환경문제에 대하여 개화된 생각을 가진 정부, 기업, 시민들의 도덕의식의 함양과 국제사회의 압력이라는 준정 치적 제재에 의존한 해결책이 제시될 수밖에 없다. 자유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 기초를 둔 신세계 질서는 환경, 인권, 자유무역 등의 문제를 총체적으로 해결해야 할 책무를 띤다고 하겠다.
따라서, 개발도상국이 지속 가능한 개발을 통하여 자국민의 복지를 향상할 수 있도록, 기술적·경제적 지원을 선진국이 해주고(Davis, 1991; Rt. Hon. Chales Caccia, MP., 1991), 선진국의 주도하에 설정된 국제환경 수준에 개발도상국이 호응할 때, 수인의 딜레마로 비유되는 환경문제의 해결이 있을 것이다.
나아가야 할 방향
그렇다면 우리의 나아가야 할 방향은 무엇일까?
정치적 권력의 사유 독점화와 경제적 부의 공유화를 추구했던 현실적 제도로서의 사회주의는 정치적 권력의 공유화와 경제적 부의 사유 독점화를 추진하고 있는 자유 민주주의보다 열등한 사회적 제도라는 것은 역사적 증명이 되었다.
사회주의는 경제적 효율성만이 아니라 환경문제에 대하여서도 엄청난 비효율성을 창출하였다. (French, 1991, 112-24) 그러나, 자유 민주주의의 궁극적 승리는 그 제도가 인류의 멸망까지를 예고하는 환경의 문제를 극복하는, 또는 적어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 주는 제도라는 신념이 설 때에만 선언될 수 있다.
헤겔의 역사관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역사의 종말'보다 '인류의 종말'이 훨씬 긴급한 실천적 문제로 다가선다. 따라서, 후쿠야마의 상상대로, 역사의 종말 이후에는 기술적 문제, 환경에 대한 관심, 세련된 소비자의 수요의 만족과 같은 문제가 우리에게 다가올 것 (Fukuyaman, 1989, 18)이라는 데에 동조하게 된다.
그러나 그에 대한 자유 민주주의의 대응이 만족스럽지 못할 경우에는, 어쩌면 마르크스의 예상과 같이 아직 발전단계에 있는 시장경제가 그 정상에 이를 때, 다시 사회주의 또는 다른 형태의 이념으로 이전할는지도 모른다.
물론 우리의 자유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은 이보다는 훨씬 강력한 것이다. 현재로서는 자유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이외의 대안으로써 인류가 당면하고 있는 환경문제, 즉 생존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이 자유 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그 해결을 해낼 것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자유 민주주의와 인간의 과학지식과 기술에 대한 신념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환경문제에 대한 영원한 해결은 우리 인식의 지평 선상에 아직 확고하게 떠오르고 있는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근자의 역사적 경험으로 인하여 자유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 대한 우리의 신념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해졌다. 그러나, '역사의 종말'은 반드시 있을 것이라는 독단적 역사관을 수용하지 못하는 우리에게는 자유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궁극적 승리는 '인류의 종말'을 해결할 때까지 기다려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