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피지기면 백전백승
많이 들어 본 말이다. 손자병법에 나오는 말이라고 한다. 이 말과 함께 짝을 이루어 쓰던 말이 유비무환이다. 나와 상대를 제대로 알고 미리 대비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손자병법에 그런 말은 없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 언제까지 틀린 말을 쓸 것인가? 정말 손자병법에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란 말이 없는 걸까?
결론부터 말하면 그런 말은 손자병법에 나오지 않는다. 비슷한 말은 있다. 그 말을 후대의 누군가가 시대적 상황에서든 개인적 다른 의도에서든 여하간 약간 각색한 것이다. 두 글자 바꾼 것이다. 그러나 그 의미는 엄청 큰 차이가 있다. 그럼 손자병법에서는 과연 무어라 했을까?
지피지기면 백전불태
손자병법에 있는 원래의 말은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는 말이다. 끝에 두 그자가 다르다. '불태'를 '백승'이라는 글자로 바꾸었다. 그럼 백전불태의 의미는 무엇일까?
'불태'라는 단어는 위태롭지 않다는 뜻이다. 위태롭다 할 때의 그 '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는 말은 적을 알고 나를 알며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는 말이 원래의 뜻이다.
이것을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 백번 이긴다는 말로 바꾼 것이다. 과연 둘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그걸 알려면 손자병법이 어떤 병법서인지를 알아야 한다.
손자병법은 어떤 책
손자병법은 흔히 전쟁에서 승리하는 병법을 기술한 책으로 알고 있다. 맞는 말이다. 나폴레옹은 자신이 손자병법을 좀 더 일찍 알았다면 하고 아쉬워했다고 한다. 이집트 원정 길에까지 가지고 가서 열심히 탐독했다는 말도 있다. 그만큼 뛰어난 병법서라는 이야기이고, 뛰어난 병법서인 만큼 승리를 위한 여러 계책이 소개되어 있다.
그러나 손자병법의 첫머리 글이 무엇인지 아는가? 보통 첫머리에 그 책의 핵심이 요약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손자병법의 첫머리는 어떤 내용일까?
손자병법의 내용
손자는 병법서 첫머리에 '전쟁은 국가의 존망이 걸린 일이니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고 있다. 당연한 말이다.
아무리 옆 나라에 비해 힘이 세서 무조건 이길 것 같아도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변수가 발생하여 패배할 수도 있다. 2차 대전 때 독일은 러시아를 침공하면서 무조건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러시아도 당시 겁을 먹고 일단 후퇴하는 전략을 썼다. 그러나 결과는 독일의 참패로 끝나고 말았다.
러시아가 겨울이 올 때까지 버티기 작전으로 나간 것이다. 그리고 겨울이 되자 독일 병사들은 생애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강추위에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수많은 독일군이 얼어 죽고 독일은 도망쳐 나와야 했다.
이런 사례는 찾아보면 많을 것이다. 그래서 손자는 아무리 힘이 세다고 해서 함부로 전쟁을 일으키지 말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병법서 첫머리에 전쟁을 하지 말라고 하고 있는 것이 손자병법이다. 손자는 결코 전쟁을 좋아하고 지지하는 사람이 아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손자병법을 읽어보면 이기기 위한 병법서라기보다는 지지 않기 위한 병법서라는 느낌도 받는다. 손자가 줄곧 주장하는 바는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선이라고 말하고 있다. 다만 전쟁이 발발했는 데 패배하면 큰 피해를 입기에 가능한 전쟁은 피해야 하지만 일단 하게 되면 이기라는 것이다. 즉 손자병법은 결코 전쟁을 부추기는 책이 아니다.
그래서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고 한 것이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을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고 했지 백번을 모두 이긴다고 말하지 않은 것이다. 손자가 얼마나 신중했는 지를 볼 수 있다.
지금은?
지금의 시대는 전쟁의 종류가 예전보다 많아졌다. 무기로 하는 전쟁, 돈으로 하는 경제 전쟁, 외교로 하는 외교 전쟁, 자원으로 하는 자원 전쟁, 식량 전쟁...... 사방이 온통 전쟁인 것이다.
이런 환경에서 과연 어떤 전략을 세워야 할까?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일까 아니면 지피지기면 백전불태일까? 백전백승이란 말은 호전적으로 들린다. 백전백승이라고 하니 무엇이 두려울까? 무모하게 돌발 행동을 충분히 할 수 있다.
그러나 백전불태의 의식을 가지고 있다면 힘은 키우되 공격은 하지 않고 조심히 경계하게 될 것이다. 결코 먼저 공격을 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대비를 잘해도 어찌 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백전백승은 공격에 좀 더 무게가 있고 백전불태는 방어에 좀 더 무게가 실려 있는 말이다. 우리가 취해야 할 것은 당연히 백전불태의 자세다. 먼저 행동을 하는 것은 안 된다. 그러나 누군가 공격해 온다면 언제든 물리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주변을 알아야 하고 나를 알아야 한다. 그래야 제대로 빠짐없이 준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걱정이다. 우리나라가 과연 상대와 나를 제대로 알고 그에 맞게 대비하는 전략을 착실히 수행하고 있는지. 이전에는 그렇다고 생가했고 어느 정도 안심이었는데 요즘은 그런 안심이 들지 않는다.
입은 백전백승을 외치는 데 행동은 대책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긴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준비를 덜하게 되고 무모하게 된다. 자신이 있으니 굳이 뭘 더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질 수도 있다는 가정을 가지고 있게 되면 항상 준비하게 된다. 질 수도 있으니 긴장하기 때문이다.
지피지기면 백전불태! 이길 수 있다는 아니 이긴다는 오만한 마음을 버리고 겸손한 자세로 항상 준비해야 한다. 그래야 막을 곳이 보이고 역공을 할 방법이 보인다. 지금의 정치권이 과연 그러고 있는지 심히 우려스러운 건 나만의 기우일까? 제발 그렇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