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블의 영화 어벤저스에 보면 타노스라는 빌런이 등장한다. 그야말로 우주적 악당으로 묘사되는 인물이다. 타노스는 우주 생명체의 절반을 죽게 만드는 계획을 세우고 이를 실행에 옮긴다. 물론 기쁜 마음으로 한 것은 아니다. 타노스의 고뇌를 생각해 보자.
<목차>
- 타노스의 고뇌
- 다수의 행복, 소수의 행복
- 타노스의 함정
- 열림 미래
타노스의 고뇌
타노스는 왜 우주에 있는 생명의 절반을 없애려고 했을까?
타노스가 어렸을 때 살던 행정은 인구의 증가로 인해 많은 문제가 발생했다. 식량과 환경의 문제, 사회적 문제 등으로 인해 그가 살던 행성은 멸망하고 말았다.
이때 그는 우주에 생명이 너무 많다는 결론을 내리고 우주를 지키기 위해서는 인구를 줄여야 한다고 깨닫게 된다. 그래서 모두 죽게 놔둘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이 절반의 생명을 없애서 남은 인구라도 잘 살게 하고자 한다.
타노스라고 그런 결정을 내리는 것이 좋지는 않았을 것이다. 영화에서도 타노스의 고뇌가 곳곳에서 보인다. 자기 딸을 죽게 만드는 장면이나, 절반의 생명이 사라지게 한 뒤의 허름한 숲 속 집에 살며 고뇌하는 장면 등을 보더라도 타노스가 결코 기쁜 마음으로 좋아서 한 행동은 아님을 알 수 있다.
타노스는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것이다. 더구나 사라지는 절반에 자기도 해당될 수 있는데도 그 길을 선택한 것이니 결코 나쁜 마음으로 한 행동은 아니다. 과연 타노스의 선택은 나쁜 것일까?
다수의 행복, 소수의 행복
공리주의는 다수의 행복을 지향한다. 그래서 다수가 얻는 행복이 소수가 없는 행복보다 클 때는 다수의 행복을 따른다. 이때 필요한 것이 규범이고 법이다. 다수의 행복을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다.
열 사람이 피해를 입은 것이 한 사람이 피해 입는 것보다 더 큰 피해인 것은 분명하다. 이럴 경우 공리주의는 한 사람이 피해를 감당하는 것이 옳다고 한다.
이로한 사상은 근대와 현대를 이끄는 원동력이 되었고 민주제도의 근간이 되어 왔다. 투표제라든가 의회 민주주의 등도 이러한 사상의 기초 위에 세워졌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이런 사고의 흐름 위에서 생각해 본다면 타노스의 선택이 나쁘다고만 활 수도 없다. 인구의 포화로 인해 모두가 죽는 것보다는 절반이라도 살아남는 것이 효용성의 측면에서는 더 낫다고 할 수밖에 없다.
타노스의 함정
그러나 타노스의 선택이 잘한 것이라고 선뜻 동의하기는 어렵다. 왜 그런가?
결정되지 않은 미래의 위험으로 인해 현재의 누군가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발생할 일이 예측된다 해도 실제 결과가 예측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일도 많다.
인구의 포화로 인해 환경과 사회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맞지만 파국을 맞는다는 가정은 그 문제들이 점점 더 커지고 인간은 그저 바라만 본다는 가정하에 가능하다.
그러나 인간처럼 생각하는 능력을 가진 존재들은 눈앞에 다가오는 불행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지는 않는다. 어떻게든 그 상황을 개선하고자 노력하게 된다. 그러한 과정을 거치며 미래의 결과는 전혀 다르게, 최소한 피해가 생각만큼 크지 않게 수정될 수도 있는 것이다.
수운 예로 태중의 아기에게 심각한 질병이 발견되었다고 해서 아이를 지울 것이냐 하는 문제가 있다. 그대로 아이를 낳을 경우 아이는 물론이고 가족까지도 고통을 받을 수 있다. 많은 가정에서 실제로 겪는 일이다.
그러나 모든 경우가 그런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장애를 가진 아이로 인해 가족 간의 결속이 다져지고 생명의 소중함을 알게 되어 더 행복해지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장애를 가진 아이를 입양하는 경우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타노스의 선택이 바로 이런 경우와 같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현재의 상황이 개선되지 못한다는 가정에 매여 우주 생명의 절반을 사라지게 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결정일까?
열린 미래
절반이라도 지키기 위한 고뇌임은 분명하지만 타노스는 미래의 불확정성을 너무 무시하는 우를 범한 것이다. 비록 뱃속의 아이가 장애를 가진 채로 태어날 것이 확실해 보여도 그렇다고 해서 그 아이의 미래가 불행하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미래는 열려 있는 것이다.
오히려 장애를 딛고 비 장애인보다 더 성공적이고 행복한 삶은 사는 사람도 분명 있는 것이다. 소아마비라는 장애를 가진 아이가 자라서 루스벨트 같은 대통령이 될 수도 있다.
듣지도 볼 수도 말할 수도 없었던 헬렌 켈러는 세계적인 위인이 됐고 스티븐 호킹은 루게릭 병을 앓으면서도 세계적인 과학자가 되었다. 장애를 가졌으면서도 인류에 공헌한 사람이 얼마든지 있고 태어날 아이가 그런 위인이 되지 말라는 법도 없다.
미래의 가능성에 대해 열린 자세를 갖는고 본다면 타노스의 선택에 절대 동의할 수가 없을 것이다.
실제 우리 주변에는 이러한 미래의 막연한 불안감으로 인해 잘못된 선택을 하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다. 회사가 부도가 나서 잘못된 선택을 하는 경우, 배우자나 동업자의 배신으로 잘못된 결정을 하는 경우, 수능 시험을 망쳤다고 역시 잘못된 선택을 하는 경우 등등.
비록 현재의 상황이 나에게 불운으로 닥쳐왔다고 해도 그런 상태가 미래에도 지속된다고 볼 수는 없다. 지금 당장의 괴로움이 지속된다고 생각하니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되는 것이다.
비록 지금의 상황이 힘들어도 미래의 어느 시점에 희망이 보장되어 있다면 누구나 지금의 불행을 견뎌낼 것이다. 결국 지금의 불행의 크기보다 그것을 견디는 마음의 크기가 작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상황에 실제 부딪힌다면 극도의 괴로움을 느끼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런 경우에는 터널의 끝이 보이지 않기 마련이다. 타노스도 그런 상황에 자기로서는 최선의 선택을 한 것이고 그 선태의 실현에 숭고한 사명감마저 갖게 된 것이다.
이로 보건대 공리주의적 사고방식이 사회의 안정과 발전에 기여한 것은 맞지만 수정해야 할 부분도 많은 걸 알 수 있다. 많은 부분 허술한 면이 있지만 공리주의는 여전히 건재하다. 민주사회에서 공리주의는 아무리 결함이 발견된다 해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위에 들은 부분들과 같은 문제점들은 분명 존재하고 그것을 수정해 나가는 작업은 계속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타노스의 고뇌가 비록 진지해 보이긴 하지만 미래의 불확정성을 미처 생각 못한 그의 결정은 결코 옳은 결정은 아니다.